성씨 이야기 김해김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경주김씨 경주이씨 경주최씨 진주강씨 광산김씨 파평윤씨 청주한씨 안동권씨 인동장씨 김녕김씨 평산신씨 순흥안씨 동래정씨  달성서씨 안동김씨 해주오씨 전주최씨 한국 성씨 아기이름 배우리 원장 개명이름 상품이름 예명 신생아이름 우리이름 고운이름 한글이름 상호 한글운동 한글이름 우리말이름 한글날 우리말운동 이름보금 이름고치기 배우리교수 

 이름사랑 - 성씨 본관 - 관향

성씨 이야기

 

 방송(성씨 이야기 등)   이름사랑 배우리 원장

KBS 2R  FM 106.1 매주 목요일 아침 5시 15분)

성씨 본관별 인구   우리 성씨의 역사  귀화성씨

 

 

    한국의 성씨와 본관   

 

이름사랑 자료 : www.namelove.com

 

 

賈가씨(소주가씨), 簡간씨(가평간씨), 葛갈씨(남양갈씨), 甘감씨(회산감씨), 姜강씨(진주강씨), 康강씨(신천강씨) 彊강씨(진주강씨), 强강씨(충주강씨), 剛강씨(충주강씨), 介개씨(여주개씨), 堅견씨(천녕견씨), 甄견씨(황간견씨)
慶경씨(청주경씨), 景경씨(태인경씨), 桂계씨(수안계씨), 高고씨(제주고씨), 曲곡씨(용궁곡씨), 孔공씨(곡부공씨)
公공씨(김포공씨), 郭곽씨(현풍곽씨-청주곽씨), 具구씨(능성구씨), 丘구씨(평해구씨), 邱구씨(은진구씨), 國국씨(담양국씨), 菊국씨(영광국씨), 鞠국씨(담양국씨), 君군씨(남원군씨), 弓궁씨(토산궁씨), 權권씨(안동권씨-예천권씨)
斤근씨(청주근씨), 琴금씨(봉화금씨), 奇기씨(행주기씨), 箕기씨(행주기씨), 吉길씨(해평길씨)

金김씨(김해김씨-경주김씨-광산김씨-김녕김씨-구안동김씨-신안동김씨-의성김씨-강릉김씨-선산김씨 -청품김씨-삼척김씨-연안김씨-청도김씨-상산김씨-전주김씨-부안김씨-순천김씨-나주김씨-월성김씨 -언양김씨-울산김씨-영광김씨-청주김씨-서흥김씨-함창김씨-도강김씨-광주김씨-개성김씨-진주김씨 -안산김씨-고령김씨-수원김씨-영산김씨-고성김씨-용궁김씨-금산김씨-예안김씨-풍산김씨-원주김씨 -밀양김씨-충주김씨-공주김씨-영양김씨-강화김씨-경산김씨-양근김씨-수안김씨-해평김씨-낙안김씨 -통천김씨-안성김씨-당악김씨-양주김씨-영천김씨-양산김씨-남양김씨-진천김씨-우봉김씨-희천김씨 -파평김씨-배천김씨-용담김씨-강서김씨-김제김씨-교하김씨-정주김씨-무장김씨-풍천김씨-진도김씨 -문화김씨-영월김씨-해풍김씨-홍주김씨-해주김씨-안악김씨-사천김씨-보령김씨-덕수김씨-창원김씨 -대구김씨-야성김씨-해남김씨-신천김씨-영해김씨-풍기김씨-영암김씨-칠원김씨-설성김씨-안로김씨 -태원김씨-동래김씨-은율김씨-금화김씨-부평김씨-평산김씨-웅천김씨-청송김씨-진잠김씨-창평김씨-정산김씨 -오천김씨-연기김씨-우록김씨-성주김씨-용궁김씨)

羅나씨(나주나씨-금성나씨-군위나씨-안정나씨), 南남씨(영양남씨-의령나씨-고성나씨), 南宮남궁씨(함열남궁씨), 浪낭씨(양주남씨), 乃내씨(개성내씨), 奈내씨(나주내씨), 盧노씨(광주노씨-해주노씨-신창노씨-곡산노씨-만경노씨-안강노씨-안동노씨-장연노씨-풍천노씨), 魯노씨(함평노씨), 雷뇌씨(교동뇌씨)

單단씨(연안단씨), 端단씨(연안단씨), 唐당씨(밀양당씨), 大대씨(밀양대씨), 都도씨(성주도씨), 道도씨(고성도씨)
陶도씨(풍양도씨), 獨孤독고씨(남원독고씨), 頓돈씨(목천돈씨), 敦돈씨(청주돈씨), 董동씨(광천동씨), 東方동방씨(진주동방씨), 杜두씨(두릉두씨)

路로씨(개성로씨), 柳류씨(문화류씨-고흥-진주)

馬마씨(목천마씨-장흥마씨), 麻마씨(영평마씨), 萬만씨(개성만씨), 梅매씨(충주매씨), 孟맹씨(충주맹씨 신창맹씨), 明명씨(서촉명씨-연안명씨-연안승씨), 牟모씨(함평모씨-광주모씨), 睦목씨(사천목씨), 墨묵씨(광령묵씨), 文문씨(남평문씨), 門문씨(인천문씨) 米미씨(경성미씨), 閔민씨(여흥민씨)


朴박씨(밀양박씨-반남박씨-함양박씨-순천박씨-무안박씨-죽산박씨-고령박씨-충주박씨-영해박씨-월성박씨-상주박씨-진원박씨-울산박씨-강릉박씨-춘천박씨-음성박씨-창원박씨-태안박씨-영암박씨-고성박씨-구산박씨-면천박씨-삼척박씨-은풍박씨-의흥박씨-태인박씨-나주박씨-상산박씨-문의박씨-선산박씨-전주박씨-봉산박씨-비안박씨-운봉박씨-순창박씨-군위박씨-여주박씨-인제박씨-평산박씨-평주박씨-평택박씨-노성박씨-사천박씨-광주박씨-거제박씨)

潘반씨(거제반씨), 班반씨(개성반씨), 方방씨(온양방씨), 房방씨(남양방씨), 龐방씨(개성방씨-대원), 邦방씨(광주방씨),

裵배씨(경주배씨-달성배씨-분성배씨-성산배씨-성주배씨-흥해배씨-곤산배씨-곤양배씨),

白백씨(수원백씨), 范범씨(금성범씨), 凡범씨(안주범씨), 邊변씨(원주변씨), 卞변씨(초계변씨), 卜복씨(면천복씨), 奉봉씨(하음봉씨), 夫부씨(제주부씨)
彬빈씨(대구빈씨), 賓빈씨(달성빈씨), 氷빙씨(경주빙씨)

史사씨(청주사씨), 謝사씨(진주사씨), 舍사씨(광산사씨), 司空사공씨(효령사공씨), 森삼씨(삼가삼씨), 尙상씨(목천상씨),

徐서씨(달성서씨-이천서씨-대구서씨-남양서씨-부여서씨-연산서씨-장성서씨-절강서씨),

西서씨(진주서씨), 西門서문씨(안음서문씨), 石석씨(충주석씨-해주), 昔석씨(월성석씨), 宣선씨(보성선씨), 鮮于선우씨(태원선우씨), 薛설씨(경주설씨-순창), 葉섭씨(경주섭씨), 成성씨(창녕성씨), 蘇소씨(진주소씨), 邵소씨(평산소씨),

孫손씨(밀양손씨-평해손씨-경주손씨-청주손씨-안동손씨),

宋송씨(진천송씨-여산송씨-은진송씨-용성송씨-양주송씨-문경송씨-덕산송씨-야성송씨-연안송씨-청주송씨- 홍주송씨-남양송씨-김해송씨-신평송씨),

水수씨(운제수씨), 舜순씨(파주순씨), 荀순씨(홍산순씨), 承승씨(연일승씨), 昇승씨(남원승씨), 施시씨(절강시씨-태인시씨),

申신씨(고령신씨-평산신씨-영산신씨-거창신씨-아주신씨), 沈심씨(청송심씨-풍산심씨-삼척심씨)

阿아씨(양주아씨), 安안씨(순흥안씨-광주-탐진-태원-죽산), 夜야씨(원평야씨), 梁양씨(남원양씨)
楊양씨(남원양씨-청주양씨), 魚어씨(함종어씨-충주어씨), 嚴엄씨(영월엄씨), 呂여씨(함양여씨-성산여씨), 余여씨(의령여씨), 延연씨(곡산연씨), 燕연씨(정평연씨), 連연씨(전주연씨), 廉염씨(파주염씨), 葉엽씨(경주엽씨), 芮예씨(부계예씨),

吳오씨(해주오씨-평해오씨-군위오씨-전주오씨-낙안오씨-장흥오씨-함평오씨-화순오씨-흥양오씨-울산오씨-동복오씨-보성오씨-고창오씨-나주오씨-연일오씨), 伍오씨(백천오씨),

玉옥씨(의령옥씨), 溫온씨(봉성온씨), 邕옹씨(순창옹씨), 王왕씨(개성왕씨-제남), 姚요씨(수원요씨), 龍용씨(홍천용씨), 禹우씨(단양우씨), 于우씨(목천우씨), 雲운씨(함흥운씨), 元원씨(원주원씨), 袁원씨(비안원씨), 魏위씨(장흥위씨), 韋위씨(강화위씨),

柳유씨(문화유씨-고흥유씨-진주유씨), 兪유씨(기계유씨-창원유씨-무안유씨-강진유씨-고령유씨-안동유씨-천령유씨), 庾유씨(무송유씨), 劉유씨(강릉유씨-배천유씨-거창유씨),

陸육씨(옥천육씨),

尹윤씨(파평윤씨-칠원윤씨-해남윤씨-해평윤씨-예천윤씨-영천윤씨-무송윤씨-함안윤씨-양주윤씨-남원윤씨),

殷은씨(행주은씨), 陰음씨(죽산음씨)

 

李이씨(전주이씨-경주이씨-전의이씨-광주이씨-용인이씨-함평이씨-광산이씨-광평이씨-진안이씨-온양이씨-덕은이씨-양주이씨-김포이씨-화산이씨-부안이씨-양성이씨-진성이씨-가평이씨-안성이씨-우봉이씨-평산이씨-고령이씨-안산이씨-정선이씨-대흥이씨-학성이씨-서림이씨-상산이씨-남평이씨-청송이씨-차성이씨-서산이씨-해남이씨-단성이씨-영해이씨-담양이씨-익산이씨-양산이씨-울산이씨-순천이씨-동성이씨-아산이씨-청해이씨-우계이씨-흥양이씨-진주이씨-봉산이씨-수원이씨-태안이씨-충주이씨-창령이씨-진위이씨-결성이씨-부평이씨-덕산이씨-나주이씨-경산이씨-영천이씨-장수이씨-재령이씨-덕수이씨-한산이씨-연안이씨-신평이씨-성주이씨-청안이씨-하빈이씨-홍주이씨-예안이씨-금구이씨-부여이씨-용궁이씨-임강이씨-여주이씨-영천이씨-합천이씨-고성이씨-원주이씨-청주이씨-인천이씨-회덕이씨-음죽이씨-인제이씨-통진이씨-수안이씨-평창이씨-안악이씨-개성이씨-강진이씨-성산이씨-공주이씨-강화이씨-함안이씨-고부이씨-벽진이씨-장기이씨),

伊이씨(태원이씨), 異이씨(밀양이씨), 印인씨(교동인씨)
林임씨(평택임씨-나주임씨-울진임씨-조양임씨-진천임씨-익산임씨-옥구임씨-경주임씨-선산임씨-옥야임씨 -안의임씨-부안임씨-은진임씨-예천임씨-장흥임씨),

任임씨(풍천임씨-장흥임씨)

 


慈자씨(요양자씨),

張장씨(인동장씨-안동장씨-흥성장씨-단양장씨-결성장씨-덕수장씨-순천장씨-옥구장씨-부안장씨-전주장씨-울진장씨-나주장씨-목천장씨-구례장씨-예산장씨-진천장씨-청송장씨-진안장씨-지례장씨-흥양장씨),

蔣장씨(아산장씨), 章장씨(거창장씨), 莊장씨(아산장씨),

全전씨(정선전씨-감천전씨-안동전씨-경주전씨-계림전씨-기장전씨-나주전씨-성산전씨-성주전씨-옥산전씨-경산전씨-옥천전씨-완산전씨-용궁전씨-천안전씨),

田전씨(담양전씨), 田전씨(남양전씨), 錢전씨(문경전씨),

鄭정씨(동래정씨-진양정씨-청주정씨-해주정씨-경주정씨-연일정씨-하동정씨-초계정씨-나주정씨-김포정씨-금성정씨-서산정씨-고성정씨-함평정씨-온양정씨-봉화정씨-장기정씨-영덕정씨-야성정씨-광주정씨-전주정씨-청산정씨-곤양정씨-서경정씨),

程정씨(하남정씨), 丁정씨(압해정씨)
諸葛제갈씨(남양제갈씨),

趙조씨(한양조씨-함안조씨-평양조씨-풍양조씨-배천조씨-임천조씨-태원조씨-김제조씨-양주조씨-횡성조씨-평산조씨-진보조씨-직산조씨-옥천조씨-순창조씨),

曺조씨(창녕조씨),

左좌씨(청주좌씨), 宗종씨(니파종씨), 鍾종씨(영암종씨), 周주씨(상주주씨-초계주씨-안의주씨-철원주씨), 朱주씨(신안주씨-능성주씨), 俊준씨(청주준씨), 池지씨(충주지씨), 智지씨(봉산지씨), 陳진씨(여양진씨), 秦진씨(풍기진씨), 晉진씨(남원진씨), 眞진씨(서산진씨)

車차씨(연안차씨), 昌창씨(공주창씨), 倉창씨(아산창씨), 蔡채씨(평강채씨), 千천씨(영양천씨), 天천씨(연안천씨)
肖초씨(제주초씨), 楚초씨(성주초씨)
崔최씨(경주최씨-전주최씨-강릉최씨-통천최씨-우봉최씨-해주최씨-초계최씨-수원최씨-동주최씨-삭령최씨-탐진최씨-수성최씨-화순최씨-양천최씨-용강최씨-충주최씨-양주최씨-낭주최씨-개성최씨-청송최씨-용주최씨-영천최씨-청주최씨-황주최씨-상주최씨-한남최씨-원주최씨-직산최씨-용궁최씨-간성최씨-곡강최씨-흥해최씨-고부최씨-광주최씨-부안최씨-상원최씨-영흥최씨-완산최씨-계림최씨-태인최씨-아산최씨-연풍최씨-강화최씨)
秋추씨(전주추씨)

卓탁씨(광산탁씨), 彈탄씨(해주탄씨), 太태씨(남원태씨-영순-협계)

彭팽씨(용강팽씨), 平평씨(충주평씨), 片편씨(절강편씨), 表표씨(신창표씨), 馮풍씨(임구풍씨), 皮피씨(괴산피씨-단양최씨-홍천피씨), 弼필씨(대흥필씨)

河하씨(진양하씨), 夏하씨(달성하씨), 韓한씨(청주한씨-곡산한씨), 咸함씨(강릉함씨), 許허씨(양천허씨-김해허씨-태인허씨-하양허씨), 玄현씨(연주현씨), 邢형씨(진주형씨), 扈호씨(전주호씨), 洪홍씨(남양홍씨-풍산홍씨-부계홍씨-풍산홍씨-홍주홍씨), 化화씨(진양화씨), 黃황씨(창원황씨-평해황씨-장수황씨-상주황씨-우주황씨), 皇甫황보씨(영천황보씨

)

 

우리 나라 성씨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剛) 강(疆) 개(介) 견(堅) 견(甄) 경(景) 경(慶)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교(橋) 구(丘) 구(具) 구(邱) 국(國) 국(菊) 국(鞠) 군(君) 궁(弓) 궉(   )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난(欒)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누(樓)

 

단(段) 단(單) 단(端) 담(譚) 당(唐) 대(大) 도(道) 도(都) 도(陶) 돈(敦) 돈(頓) 동(董) 두(杜) 두(頭)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모(牟) 모(毛) 목(睦) 묘(苗)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房) 방(方) 방(邦) 방(龐)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변(邊)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빙(氷)

 

사(史) 사(謝) 사(舍)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석(昔) 석(石) 선(宣) 설(卨)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淳) 순(荀) 순(舜)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愼) 신(申) 신(辛)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영(影) 영(榮) 영(永) 예(芮) 오(吳)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雲) 운(芸)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柳) 유(兪) 유(劉)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음(陰) 이(李) 이(異) 이(伊)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章) 장(莊) 장(蔣) 저(邸) 전(全) 전(田) 전(錢) 전(傳) 점(占) 정(丁) 정(程) 정(鄭) 제(諸) 제(齊) 조(趙) 조(曺) 종(宗) 종(鍾) 좌(左) 주(周) 주(朱) 준(俊) 지(智) 지(池) 진(晋) 진(眞) 진(秦) 진(陳)

 

차(車) 창(昌) 창(倉) 채(蔡) 채(菜) 채(采) 천(千) 천(天) 초(楚) 초(肖) 초(初) 최(崔) 추(秋) 추(鄒) 춘(椿)

 

탁(卓) 탄(彈) 태(太) 판(判) 팽(彭) 편(扁) 편(片) 평(平)

 

포(包) 표(表) 풍(馮) 피(皮) 필(弼)

 

하(河) 하(夏) 학(   ) 한(漢) 한(韓) 함(咸) 해(海) 허(許) 현(玄) 형(邢) 호(扈) 호(胡) 호(鎬) 홍(洪) 화(化) 환(桓) 황(黃) 후(侯) 후(後) 흥(興)

 

강전(岡田) 남궁(南宮) 독고(獨孤) 동방(東方) 망절(網切) 사공(司空) 서문(西門) 선우(鮮于) 소봉(小峰) 장곡(長谷) 제갈(諸葛) 황보(皇甫)

 

 

 성씨의 유래

 

김(金)씨의 유래

김씨는 우리 나라 인구중에서 가장 많은 성씨로서 김씨는 크게 나누어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하는 수로왕계(김해 김씨)와 신라 왕실의 박, 석, 김 3성 중의 하나인 김알지계로 나눌 수 있다.

김씨의 본관은 "씨족통보"에 623본으로 나타나있으며 이중 김알지계의 김씨는 600여개의 본관이 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약 280여개의 본관이 있었다.    

또 다른 김해 김씨가 있는데 임진왜란때 왜장이 조선에 귀화하여 만든 김해(사성) 김씨가 있다.

김씨는 우리 나라 성씨중 인구가 가장 많으며, 2000년 조사에선 3,102,537가구, 9,925,949명(전체 인구의 약 22%) 로 나타났다.

- [ 김알지계 김씨의 유래 ]

가평 감천 강남 강동 강릉 강서 강원 강주 강진 강화 개성 거창 결성 경기 경남 경북 경산(京山) 경산(慶山) 경상 경주 계림 고령 고부 고산 고성 고양 곡성 곤양 공주 광명 광산 광성 광양 광주 광천 광해 괴산 교하 구례 금릉 금산 금정 금평 금화 김녕 김성 김제 김천 김해(가락) 김해(우록) 김해(법흥) 김화 나주 낙안 남양 남원 남평 남포 남해 능주 달성 담양 당산 당악(해남) 당악(唐岳) 대구 대영 대전 덕산 덕수 도강 도광 동래 동양 등주  무송 무안 무장 무주 문경 문산 문화 밀양 백천 별성 보령 보성 봉산 봉화 부안 부여 부평 북실 분성 사창 사천 삼척 상산 상승 상주 서산 서울 서흥 선산 선성 설성 성남 성산 성선 성은 성의 성주 성천 수성 수안 수원 수주 순창 순천 순흥 승산 승평 신성 신안 신천 신평 안로 안동(구) 안동(신) 안산 안성 안악 안양 안흥 야성 양근 양금 양산 양주 양평 언양 여주 연기 연산 연성 연안 연주 연풍 염포 영광 영덕 영동 영산(永山) 영산(靈山) 영상 영암 영양 영월 영일 영주 영천 영해 예산 예안 예천 오천 옥산 옥천 온양 온전 완산 용광 용궁 용담 용산 용성 용인 우록 우봉 울산 웅천 원양 원주 월성 유성 은성 은율 은진 의령 의성 의주 의흥 이양 이천 인동 인천 일성 임진 인파 장성 장수 장연 장학 장흠 적성 전남 전북 전의 전주 정산 정선 전읍 정주 제주 죽산 중화 진도 진산 진성 진영 진위 진잠 진장 진주 진천 진해 창녕 창원 창평 천안 칠성 철원 청덕 청도 청산 청송 청양 청주 청평 청풍 초계 춘양 춘천 충남 충주 칠원 태원 토산 통천 파주 파평 평강 평산 평양 평창 평택 평해 풍기 풍덕 풍산 풍천 하음 한남 한산 한성 함안 함양 함영 함창 함평 함흥 합천 해남 해동 해주 해평 해풍 현풍 홍주 홍천 홍해 화성 화순 황산 황주 흥덕 희천

 

 이(李)씨의 유래

현재 우리 나라 이씨의 본관은 237본인데, 그전의 '증보문헌비고'에서는 451본으로, '조선씨족통보'에서는 546본으로 나타났던 일이 있다. 이를 견주어 보면 오늘날 이씨의 본은 과거보다 많이 줄어든 셈이다.

이 237본의 이씨는 대체로 한국계(韓國系)와 중국계(中國系)와 기타계(其他系)로 분류할 수 있다.

한국계 : 한국계는 신라 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가평이씨(加平李氏), 금구이씨(金溝李氏), 덕은이씨(德恩李氏), 아산이씨(牙山李氏), 영천이씨(永川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 원주이씨(原州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진위이씨(振威李氏), 진주이씨(晋州李氏), 평창이씨(平昌李氏), 합천이씨(陜川李氏) 등이 이에 속한다.

중국계 : 고성이씨(固城李氏), 상산이씨(商山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연안이씨(延安李氏), 원주이씨(原州李氏), 정선이씨(旌善李氏), 청해이씨(靑海李氏), 태안이씨(泰安李氏), 태원이씨(太原李氏), 평산이씨(平山李氏) 등이 이에 속한다.

기타계 : 기타계로는 안남국(安南國: 현재의 베트남)의 왕 이천조(李天祚)의 아들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우리 나라로 망명, 옹진반도 화산(花山)에 정착하여 산 화산이씨(花山李氏)와 김알지 후손인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분적한 광산이씨(光山李氏)와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 있다.

이씨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것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이씨 중에는 현재 24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전주이씨가 인구로 보아 가장 으뜸이다.

경주이씨는 신라 육성(六姓)(李, 崔, 鄭, 孫, 裵, 薛)의 하나로 우리 나라 이씨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씨족이다.

<경주이씨대동보> 총론편을 보면 경주이씨의 유래가 나온다. 전설적이지만 신라 6성의 시조 6명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곧 육인천강설(六人天降說)이다. 경주이씨의 시조 알평(謁平)은 처음에 하늘로부터 박바위[瓢岩]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 곳은 육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인데, 나중에 급량부(及梁部)로 명칭이 바뀌었다. 기원전 69년(前漢 宣帝 地節 元) 3월 초하루, 이 6촌장이 알천(閼川)의 바위 위에 모여 양산(陽山) 아래를 바라보니, 번개빛 기운이 서린 속에 흰말이 무릎 꿇고 절하는 모양이 보여, 찾아가 보니 검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슬피 울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래서 6촌장이 그 알을 깨 보니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모두들 이상히 여겨 그 아이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불렀다. 이 혁거세가 13세가 되자, 기원전 57년(前漢 宣帝 五鳳 元)에 이를 왕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를 건국한 공로로 알평은 아찬(阿餐)의 벼슬에 오르고 기원전 32년(新羅 儒理王 8)에 이씨(李氏)를 사성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알평이 경주이씨 시조가 되는데, 과거의 <경주이씨족보>에는 알평의 먼 후손 이거명(李居明)(蘇判公)을 중시조 1세로 삼아 계대수를 따져 왔다. 그래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는 몇 대가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근 2백년 전 조선 말기 무렵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의 대수와 이름이 나타나 36대의 명단을 찾아냈다고 한다.

(1)알평- (2)유- (3)타- (4)중가- (5)석- (6)문상- (7)방- (8)수장- (9)수- (10)기정- (11)미선- (12)성립-(13)서- (14)계환- (15)걸- (16)선장- (17)기담- (18)인흥- (19)확- (20)선정- (21)체- (22)태휘- (23)우영- (24)준- (25)소- (26)경지- (27)욱- (28)원장- (29)한로- (30)계탕-(31)도- (32)사언- (33)기- (34)희두- (35)계- (36)거명- (34)진두- (35)백전- (36)공- (36)한(翰)

위에서 보면 시조 이알평부터 36세손 이거명까지의 계통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이거명을 중시조 1세로 따져온 것이다.

여기서 전주이씨와의 문제는 바로 34세 희두(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와 그의 둘째 손자인 한(翰)이 관계되는 것이다. 여기서 34세 진두씨의 약력에 나와 있는 "공도 문장가로서 경문왕 때 임오년에 형 시중공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랑평 장사내사상병부령에까지 이르렀다. <세장보(世藏譜)>를 참고하건대 이분의 손자 한(翰)이 完山 李씨의 시조가 되었다더라." 기록에 의하여 이진두의 둘째 손자 한이 바로 전주이씨의 시조 사공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상서공파세보(尙書公派世譜)>에는 (34세)진두(辰斗)-(35)백전(白全)-(36) 공(恭)-(37) 한(翰)으로 세계를 꾸며 놓고 이한(李翰)의 약력에 "대사공 은상서 어사중승 상상주국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 김은의의 딸이다. 전주이씨의 시조다"라고 적어 놓았다. 여기서도 한(翰)이 전주이씨의 시조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경주이씨 족보와 다른 점은 공(恭)과 한(翰)을 형제가 아닌 부자 사이로 바꾸어 놓은 것이 이상하다.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으로 경주이씨 족보에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은 원주이씨(原州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아산이씨(牙山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 등. 이 성들은 분적된 기록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주이씨가 경주이씨에게서 갈라져 나갔다는 기록은 위에서와 같이 매우 애매하고, 또 그 기록이 한(翰)씨의 약력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조부의 약력에 기재되어 있는 점이 더욱 이상하다.

이상으로 볼 때, 전주이씨가 중국에서 왔다거나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하지만, 기록들이 애매모호하다.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은 아마 옛날 사대사상에서 연유한 야사적 기록이라 세직(世稷: 世直)의 세(世)자가 당나라 태종 리세민(李世民)과 같은 항렬자로 본 것이다. 또 경주이씨에게서 왔다는 기록은 경주이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니까 혹시 갈라져 온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경주이씨는 현재 이알평 시조로부터 오늘날 75세 희(熙)자 항렬까지 2천여년의 역사를 가졌고, 경주이씨의 중시조 이거명과 전주이씨의 이한은 동항렬(同行列)이므로 이분이 우리의 시조라면 연대는 비슷하리라 본다. 그러나 기록이 분명치 않으니 전주이씨 시조 신라 사공(司空) 한(翰)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는 단언할 근거가 없어 정확하게 규명될 후일을 기약해 봐야 한다.

그러나 전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대흥이씨(大興李氏) 영해이씨(寧海李氏) 등도 있다.

전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한의 21대손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안사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 곳 지주(知州:지금의 지사(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지주(知州)가 다시 그 곳으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 : 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탁조(度祖) 춘(椿 : 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 : 영흥(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 운동에 내응하여 쌍성(雙城) 함락에 결정적인 공(功)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성계는 영흥(永興)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가 되어 원나라 군사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였다.

이씨는 2000년 현재, 총 240개의 본관과 2,113,007구 6,794,637명(전체 인구의 15%)이 있는데, 본관은 다음과 같다.

가리 가평 간성 강동 강릉 강양 강진 강화 개성 거창 결성 경기 경남 경북 경산 경성 경주(월성) 경준 경진 계령 계룡 계양 고구 고령 고부 고성 고양 고창 고흥 곡산 공산 공주 광산 광양 광주 광평 (선산)  괴산 교하 군위 금구 금산 금성 기장 (차성) 김천 김포 김해  나주 남양 남원 남평 농서 농성 단성 단양 담양 당진 대전 대흥 덕산 덕수 덕순 덕원 덕은 덕찬 덕흥 동래 동령 동성 (사천)  동평 마산 문신 문안 문화 밀양 백성 백천 벽산 벽진 보성 보은 봉산 부안 부여 부평 사천 삼척 상산 상주 서림 서산 서천 선산 선성 성산(광평) 성산 성주 성준 수안 수원 순천 순흥 승평 신령 신평 신풍 아산 안동 안산 안성 안악 안양 안평 양동 양산(梁山) 양산(陽山) 양성 양주 양평 여강 여주 여흥 연극 연산 연안 연일 연천 영광 영양 영월 영일 영주 영준 영천(寧川) 영천(永川) 영춘 영해 예산 예안 예천 오현 옥천 온양 완산 여산 용궁 용인 용천 우견 우계 우봉 울산 원산 원주 은진 음죽 의령 의성 이천 익계 익산 익흥 인제 인주 인천 임강 임천 장기 장성 장수 장천 장흥 재령 전원 전은 전의 전주 정선 정주 제주 증평 진보(진성)  진안 진위 진주 진해 차성(기장) 창녕 창원 천안 철성 청도 청송 청안 청양 청주 청평 청해 초산(정읍) 춘천 충남 충주 칠성 태안 태원 토산 통진 평산 평양 평창 평택 평해 풍천 하동 하빈 하산 하음 학성 한산 한성 한양 함경 함안 함양 함평 함풍 함흥 합천 해남 해령 해주 행주 헌양 홍성 홍주 홍천 화산 화평 황주 회덕 회양 흥양

 

  박(朴)씨의 유래

강남 강릉 강원 강진 경주 고령 고성 고흥 공주 광산 광주 구산 군위 김해 나주 난포 남양 남원 남주 남평 노성 단양 달성 담양 대천 덕원 덕진 면천 영성 무안 문의 문주 문화 미산 밀양 반남 보성 봉산 부산 부안 비안 사천 삼척 삼화 상산 상성 상영 상주 선산 설성 성신 성주 수원 순창 순천 순흥 안동 안성 압해 야성 언양 여수 여주 연안 영암 영양 영월 영천 영해 영흥 예천  운봉 울산 월성 은풍 음성 의령 의성 의형 의흥 이산 인제 인천 일성 임실 장성 장흥 전주 정선 정승 정주 제주 주계 죽산 증평 진안 진주 진주 진흥 창녕 창원 천안 청송 청주 초계 춘천 충주 태안 태인 평산 평양 평주 평택 하명 한산 한양 함인 함양 함열 함흥 해남 해명 해주 현천 현풍 총 127개의 본관과 3,435,640명이 있다.(1985년)

[유래]

신라가 생기기 전에 여섯개의 마을(6부)에 촌장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이(李)씨의 조상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의 알평(謁平).

2. 최(崔)씨의 조상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 - 삼국유사에는 정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하고 있다.

3. 손(孫)씨의 조상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

4. 정(鄭)씨의 조상인 취산 진지촌( 山 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삼국유사에는 최씨의 조상으로 되어있다)

5. 배(裵)씨의 조상인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의 지타(只他).

6. 설(薛)씨의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

기원 전 69년 이들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 때 남쪽을 보니 양산 아래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흰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서 보았더니 박같이 생긴알이 있어서 알을 깨어보니 그 곳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아이를 혁연히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고 박에서 나왔다며 성을 박이라고 해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갈비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얼굴과 입술이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이아이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알영(閼英)이라고 했다.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되고 알영을 왕비로 삼았으며 나라이름을 서라벌(신라)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과 일성왕(신라 7대)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관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한편 일성왕계는 그의 25대손인 경명왕(신라 54대)과 경애왕(신라 55대) 대에서 다시 갈라졌는데,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 밀양, 반남, 진원 박씨 등

- 둘째 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 고령 박씨

- 셋째 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 : 함양, 삼척 박씨 등

- 넷째 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 : 죽산, 음성, 고성 박씨

-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 : 상주, 충주 박씨

-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 : 전주, 무안 박씨

-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 : 순천, 춘천 박씨 등

- 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 : 경주 박씨의 8대군파와

-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 : 울산 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 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김씨, 이씨와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다.

박씨는 옛문헌에 314본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127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중 46개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대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는 3,435,640명으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 순위는 275성 중 역시 김씨, 이씨, 다음으로 제3위였다. 2000년도 조사에선 1,215,918가구, 3,895,121명(전체의 약 9%).

 

최(崔)씨의 유래

최씨[(崔氏)는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다.

역사상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 거족으로, 많은 선조들이 찬란한 업적들을 이룩해 놓았다.  

최씨 특유의 기개, 신념, 절조 등으로 '최고집' 혹은 '최씨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난다 ' 등의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의 6촌중에 돌산고허촌 사량부 촌장 소벌도리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 전 57년경 유민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신라 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봄, 6부를 개정하고

알천 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씨[李氏].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는 최씨[崔氏],   

무산 대수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孫氏],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에게는 정씨[鄭氏],

금산 가리촌장 기타 에게는 배씨[裵氏],  

명활산 고야촌장 호진에게는 설씨[薛氏]의 성을  내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위의 6부의 촌장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시조는 소벌도리의 24세손이며, 신라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을 주축으로 하여  선대 및 후대에서 분파되었다고 보면 정확하다.

문헌에 의하면 최씨는 387본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가 지명이고 실제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43본이다.

 [경주최씨 상계세보]의 기록으로는 소벌도리의 24세손 최치원의 윗대에서 분파된 본관으로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군옥파)가 있고,  최치원의 후대에서는 함양, 청주,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탐진, 전주(순작,균)가 분파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경주최씨를 원조로 하는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후예임은 틀림없다.

이렇게 신라시대에 웅기한 최씨는  신라에서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등 세사람이 똑같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문창후, 최치원 같은 대문장가는 동양의 역사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명현으로  동양최고의 지성[至聖]이고 한문학의 대가로  추앙받고 있으며, 고려때와서는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고려사>를 보면 서기 1196년~1258년까지 60여년간 군벌정치로 한때 최씨왕국을 방불케 했다.

명장 최영[최영]은 수많은 국내외의 혼란이 있을 때마다 평정하여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에 공헌했으며, 두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은 우리민족의 얼이요, 최씨의 특성이다.

경주시 교동에 있는 '최부자집'은 12대 만석과  10대 진사로 유명하며, 문공부가 1969년에 "신라의 집"으로 선정하고 길이 보존하기로 했다.  마지막 만석군 최준[최준]은 조선 청백리 정무공 최진립[崔震立]의 11세손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100억원(현재기준)을 보내어, 해방후 임시정부가 환국하자 백범 김구선생이 제일먼저 만나보고싶은 분이 최준이라고 하였으며, 당시 조선총독들이 문교부장을 요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최준은 특히 육영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였는데,  그예로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였으며,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 도서관 건립 등이 있다. 조선때 명종, 선조, 인조 임금은 선현[先賢]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을 불문하고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마라" 고 전교하였다.

이렇게 대대로 나라에 공헌하고  근대사회 발전에 앞장서온 최씨들의 발자취로 하여금  명문 최씨 가문은 더욱 빛이나고 있다.

최씨는 2000년도 조사에서 676,773가구, 2,169,704명(전체 인구의4.7%)으로 나타났다. 여러 성씨 중 인구별로는 제 4위였다.

 

정(鄭)씨의 유래

정씨(鄭氏)의 본관은 경주(慶州)·동래(東萊)·영일(迎日)·하동(河東)·진양(晉陽) 등 약 40여 본이 있다. 정씨의 대부분은 신라 6부촌장의 한 사람인 취산 진지촌(珍支村;本彼部)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다.

서산정씨(瑞山鄭氏)나 낭야정씨처럼 중국에서 귀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백호를 도시조(都始祖)로 하는데, 후손 동충(東沖)이 신라 유리왕(儒理王) 때 정씨로 사성(賜姓)되었다.

정씨 중에는 동래정씨(약 44만)가 가장 인구가 많고, 경주(약 30만), 진양정씨(약 24만), 연일(약 22만)가 그 뒤를 잇는다. 진주정씨는 진양정씨와 같은 본관으로 본다.

2000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 조사에 의하면 626,265 가구, 2,010,117명(전체 인구의 4.4%)으로 총 274개 성 가운데 제5위였다.

 

장(張)씨의 유래

결성 경주 고성 광주 구례 나주 남양 남원 단양 담양 당진 대구 덕수 동래 목천 밀양 백천 봉산 봉성 부안 부여 순창 순천 순흥 안동 안성 안양 영안 영동 영천 예산 옥구 옥산 옥천 울진 인덕 인동 장수 장흠 전주 절강 제주 지례 진안 진주 진천 창녕 천녕 청송 청주 춘천 충주 태원(충주) 평택 훙덕 한양 함평 해주 해풍(풍덕) 흥성 흥양 흠해

총63개의 본관과 810,231명이 있다.(1985년)

우리나라의 모든 장(張)씨는 중국에서 들어왔으며, 크게 3 갈래로 볼 수 있다.

덕수 장씨의 시조 장순용은 아랍(이슬람)계의 사람으로 고려 고종 때에, 절강 장씨의 시조 장해빈은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에,

안동 장씨의 시조 장정필의 선조는 신라 말에 각각 중국에서 들어 왔으며, 그밖의 대부분의 장씨는 안동 장씨에서 분관되었다. 그러나 흥성, 나주, 순천, 진천 등은 장유를 시조 또는 선조로 하고 있으나 서로 시기나 내용이 맞지 않는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장보고 등 장씨 성을 가진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들의 본관과 계통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배씨(裵氏)의 유래

사로(斯盧:서라벌)의 육촌(六村) 중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祗陀)를 시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자료가 전하지 않아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모신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나 《중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의 기록에 따르면, 배씨는 현경(玄慶)의 증손 사혁(斯革:가락군)에게 아들 4형제가 있어 맏아들 원룡(元龍)은 분성(盆城), 둘째 천룡(天龍)은 성산(星山), 세째 운룡(雲龍)은 달성(達城), 네째 오룡(五龍)은 흥해(興海)로 나뉘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배씨는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77,580가구에 323,0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산(京山), 경주(慶州), 곤산(昆山), 김해(金海), 남해(南海), 달성(達城), 대구(大丘), 분성(盆城), 성주(星州), 영암(靈巖), 협계(俠溪), 흥해(興海)

 

yy4

유씨표기는 (柳氏) ‘유’ 아닌 ‘류’로 해도 된다

 

2004년 11월 초에는 호적부의 성명란에 ‘柳’씨 성의 한글 표기는 ‘류’가 아닌 ‘유’로 해야 한다는 대법원 해석이 내려졌었다.

대법원은 "30년간 ‘류’로 사용해온 성의 한글표기가 최근 여권 재연장 신청을 하면서 ‘유’로 바뀌었다."며 류모씨가 대법원 홈페이지에 올린 질문에 대해 "94년에 제정되고, 96년에 개정된 호적예규에 따라 한글표기를 '유'로 한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11월 9일 밝혔다.

대법원은 “호적에 한자로 된 성을 한글로 기재할 때는 한글맞춤법에 의해 표기하도록 규정된 호적예규에 근거해 '柳·李·羅'를 호적에 한글로 표기할 때는 두음법칙을 적용, '류·리·라'가 아닌 '유·이·나'로 표기한다."고 설명했다.

류씨 종친회측은 “성표기는 고유명사이며 두음법칙에 해당되지 않는다.”면서 “호적예규 개정운동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04.11.9 서울신문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그러나, 그 뒤로 대법원에서는 이를 뒤집고, '류씨(유씨)'처럼 두음 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 성씨를 한자의 원음으로 표기할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내렸다.

 

<보도> 2007.12.23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호적에 한자로 된 성을 한글로 기재할 때 `柳(류)ㆍ羅(라)ㆍ李(리)' 처럼 소리나는 대로 쓸 수 있게 된지 석 달 만에 유씨 2천여명이 류씨로 변경해 달라는 호적정정허가 신청을 법원에 냈다.

23일 대법원에 따르면 두음법칙 예외를 인정토록 개정한 호적예규를 8월1일 시행한 뒤 10월31일까지 접수된 정정허가 신청은 柳(류)씨 2천45명, 羅(라)씨 50명, 李(리)씨 15명 등 모두 2천110건이다.

대법원은 성(姓)이 사람의 혈통을 표시하는 고유명사로서, 일상생활에서 본래 소리나는 대로 사용해 온 사람에게까지 두음법칙을 강제해 기존에 쓰던 표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인격권 또는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예규를 개정했다.

따라서 `류ㆍ라ㆍ리'씨 등 일상생활에서 본래 음가(音價)대로 성을 발음하고, 사용해 온 사람이 주민등록등본, 학적부, 졸업증명서, 문중 확인서 등 증거를 제출하면 호적의 한글표기 정정이 허용된다.

호적정정허가 신청은 본적지 관할 가정법원에 내고, 정정결정문 등본을 받은 뒤 1개월 내에 시ㆍ구ㆍ읍ㆍ면의 장에게 정정신청을 해야 하며, 성의 한글표기 재정정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국민 1천100만명이 두음법칙 적용여부가 문제되는 성을 갖고 있는 만큼 호적정정허가 신청은 꾸준히 접수되고 있으며, 정정허가를 받은 사람에게 자녀가 있으면 자녀 성의 한글표기도 호적공무원의 직권에 따라 부모의 것과 일치되기 때문에 실제 변경자는 신청자 수보다 훨씬 많다.

한기철 사무관은 "우리나라에 李(이ㆍ리)씨 성을 가진 사람만 780만명인 점에 비춰 보면 예상했던 만큼 정정신청자가 많지는 않다"며 "내년 1월1일부터 호적제 대신 가족관계등록제도가 시행되면 신청자가 더 늘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noanoa@yna.co.kr

 

참고: 두음법칙 적용을 받는 성씨들

李氏(이 *'리'가 아님)  盧氏(노 *'로'가 아님)  硫氏(유 *'류'가 아님)  羅氏(나 *'라'가 아님)  

呂氏(여 *'려'가 아님)  林氏(임 *'림'이 아님)  梁氏(양 *'량'가 아님)  廉氏(염 *'렴'이 아님)  

龍氏(용 *'룡'이 아님)  

 

 

  우리 성씨의 역사  

 

배우리(이름사랑 대표)

 

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인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시대의 성은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 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현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1486년(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족    보  

 

배우리(이름사랑 대표)

 

족보의 의의

족보(族譜)는 성씨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로 시조(始祖) 부터 역대 조상의 얼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이 족보에 실려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수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이에따라 옛날부터 족보는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정한수를 떠서 절을 두번한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을 대하듯 하였으며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소중하게 여겨온 족보가 해방후의 서양화와 지금의 핵가족 제도가 되면서 봉건사상의 유물로만 생각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서, 또 지금도 '근본이 없는 사람' 으로 치부되었을 때 그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조상들이 족보를 왜 그렇게 소중히 여겼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족보는 '피의 기록이며 혈연의 역사' 이다.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켜온 족보를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야 할 것이다.

 


족보의 역사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외국에도 '족보학회'나, 심지어는 족보전문 도서관이 있는 곳이 있는 등 가계(家系)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우리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문헌으로까지 만들어 2천년 가까이 기록 해온 나라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성씨 관계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었으며, 개인의 족보를 갖게 된것은 한(漢) 나라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특히 중국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후 모든 족보의 표본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대,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제도적으로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조선 성종7년)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년(조선 명종20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기록하여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 두어 기자(기원전 1122년 우리나라에 왔다고 함)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거나, 중국의 인물을 고증도 없이 조상 이라고 하는 식으로 족보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중화사상에 물들은 일반적인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족보를 간행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의 격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족보의 종류

1.대동보(大同譜) - 같은 시조 아래에 각각 다른 계파와 본관을 가지고있는 씨족을 함께 수록하여 만든 족보책이다.

2.족보(族譜), 종보(宗譜) - 본관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를 수록한 족보책으로, 한 가문의 역사와 집안의 계통을 수록한 책이다.

3.세보(世譜), 세지(世誌) - 한 종파 또는 그 이상이 같이 수록되어 있거나, 한 종파만 수록된것을 말하며 동보(同譜), 합보(合譜)라고도 한다.

4.파보(派譜), 지보(支譜) - 시조로 부터 시작하여 한 종파만의 이름과 벼슬, 업적 등을 수록한 책이다. 이들 파보에는 그 권수가 많아 종보를 능가하는 것도 적지 않다. 파보는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증가되어가고, 그 표제에 연안김씨파보, 경주이씨 좌랑공파보, 순창설씨 함경파세보 등과 같이 본관과 성씨 외에 지파의 중시조명 또는 집성촌, 세거지 지명을 붙이고 있으나, 내용과 형식에서는 족보와 다름없다.

5.가승보(家乘譜) - 본인을 중심으로 수록하되, 시조로부터 자기의 윗대와 아랫대에 이르기까지의 이름과 업적 ,전설, 사적을 기록한 책으로 족보 편찬의 기본이 된다.

6.계보(系譜) -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낸 도표로서, 한 씨족 전체 또는 한 부분만을 수록한 것이다.

7.가보(家譜)와 가첩(家牒) - 편찬된 형태, 내용에 상관없이 동족 전부에 걸친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한 세계표(世系表)를 가리킨다.

8.만성보(萬姓譜)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국내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줄기를 추려내어 모아놓은 책으로 모든 족보의 사전 구실을 하는 것이다. 『청구씨보(靑丘氏譜)』, 『잠영보(簪纓譜)』, 『만성대동보(萬成大同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9.기타 - 『문보(文譜)』, 『삼반십세보(三班十世譜)』, 『진신오세보(縉紳五世譜)』, 『호보(號譜)』와 같이 현달한 조상의 세계를 명백히 하려고 한 보서(譜書)나 『대방세가언행록(帶方世家言行錄)』, 『보성선씨오세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 등과 같이 조상 중 충, 효, 절, 의가 특히 뛰어난 사적과 공훈을 수록한 것도 있다. 또한,  환관(내시) 사이에도 계보를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이 다른 자손을 입양시켜 자손으로 삼고 가계를 보존하고 있는 양세계보(養世系譜) 등도 있다.

 

 

첫 구성 2005년 5월 31일  / 080821